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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 심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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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 서서(유시민 알릴레오 해명에 대한 반박문)
2019.05.02
의원실 | 조회 1886

역사 앞에 서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51일 자신의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를 통해 다시 한 번 진실을 왜곡하는 예능의 재능을 발휘했다. 유 이사장은 자신의 진술서에 언급된 서울지역 학생회장단, 서울대 학생회 간부 외 지명수배된 사람이 없다’, ‘정치인과 묶여서 휘말리면 안된다는 원칙으로 김대중에 대한 언급은 안했다”, “조직을 완벽히 보호했다”, “자신의 진술서는 심재철이 체포된 후에 7월 심재철 것을 가져와 강요해 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본 의원의 유죄의 핵심증거로 재판부에 제출된 유시민의 합수부 진술서는 본인이 체포(6.30.)되기 전인 6.11.6.12. 작성되었다.

 

유시민은 학생 시위와 관련하여 이미 공개되었거나 어차피 알려질 수밖에 없는 일들을 세세하게 진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시민은 학생운동권 상세 지도와 같았던 그의 진술서에서 총학생회장단이나 학생지도부 외에 복학생 등 여타 관련자와의 사적 대화까지 상세하게 진술해 수사초기 신군부의 눈과 귀를 밝혀준 셈이 되었다. 그의 진술 탓인지 1980611일자 유시민 진술서에 언급된 77명 중 미체포자 18명이 617일 지명수배되었고 이 중 체포된 복학생 중 일부는 이해찬에 대한 공소사실의 중요 증거가 되었다.

 

유시민의 진술서에는 이해찬 등 복학생들이 학원 자율화 등 학내시위를 정치적인 이슈로 전환하기 위해 가두시위를 독려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그의 진술서에는 수사관이 특정 부분에 밑줄치고 주목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김대중, 이해찬, 민청협, 복학생, 정치적 발언, 시위등의 문구에는 빠짐없이 밑줄을 쳐가며 주목했고, 이런 정보들 때문5.22. 합수부 중간수사발표 때는 빠져있던 이해찬과 민청협(국민연합 산하단체로 기소됨)이 이후 수사선상에 오른다. 김홍일의 합수부 진술서에 이해찬이 언급되어 있었지만 학생시위와 연관을 찾지 못했던 합수부는 중간수사 발표 때까지는 연청(회장 김홍일)이 학원시위를 사주한 것으로 설정하고 연청 지도부를 대거 지명수배했다. 하지만 실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최종 기소된 피고인 24인 중 연청은 한 명도 없고 대신 민청협 지도부 5명과 관련 복학생 1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611일 유시민 진술서에는 9명의 서울대 복학생들의 행적이 상세히 나오고 이 중 4명은 617일에 추가로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판결문에는 증거의 요지로 총 63명의 이름이 판시되었는데 이중 유시민과 복학생을 포함한 학생 운동권 21명이 포함되어 있다.

 

유시민이 진술한 복학생, 이해찬, 김대중등에 수사관이 밑줄 친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아래 진술서 원문 중 밑줄 친 부분은 당시 수사관이 표시한 밑줄. 김대중, 이해찬 이외 이름은 본 의원이 익명 처리함)

이때 웬 복학생 한명이 와서 모든 학생이 다 수원으로 가기에는 버스 15대로는 부족하니 남은 학생들끼리 시국성토대회를 하게 마이크를 넘겨달라고 하여습니다.(중략)그 복학생이 바로 학기 초부터 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사회학과)이었습니다.(001180)

 

복학생 약300명 외에 대부분이 복학생들의 시국성토대회를 구경하는 일반 재학생들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후 사회를 본 사람이 P(자연대 미생물학과)이며 그가 사회 구호선창, 데모지휘등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은 14:30시부터 16:00사이 아크로폴리스 교문상의 진입로를 왕복하면서 계엄해제등의 구호와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교내시위를 벌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구경하지 못했으므로 뭐가 뭔지 자세히는 모르나 이날 복학생총회에서의 시국성토와 교내시위가 다음날부터 정치문제로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고조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고 그에 따라 학생회는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알고있습니다.(001193~001194)

 

운영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중략)그리고 저 등이 있을 때 18:00 조금 넘어 Y(인문대), S(사회학과), O(철학과) 등 복학생 6명 정도가 들어왔고 이때 심재철은 방문 맞은편에 앉아있다가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어서오쇼하고 인사를 한 것으로 보아 복학생과 심재철 사이에 미리 양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001195)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를 보았으나 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 사람은 Y(인문대)이었으며 S 등 다른 복학생들도 다들 병영집체 훈련을 거부한채 민주화투쟁을 벌이면 우리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여론이나 국민들의 인식이 악화되므로 병영집체훈련거부는 깨끗이 철회하고 52일부터는 교내시위를 벌이면서 비상계엄문제를 이슈화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처음에 경영대 학생회장 C, 사범대 학생회장 C 등이 반대의 뜻을 보였으나 결국 설득당해 복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001195~001196)

 

심재철과 K(복학생)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지 않나 추측됩니다(001222).

 

51710:00K(복학생, 경제과 4)이 저를 찾아와 총대의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지금 대세가 우리한테 유리하다. 이대에서 열리는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는지 모르지만 이 대세를 몰아 19일과 20일에도 가두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해 저는 ,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결정할 일도 아니고 총학생회장이 돌아오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라고만 대답하였습니다.(001240)”

 

4월 중순경 총학생회 사회부에서(사회부장, H, 인문대 철학과 3) 제작 배포한 사북사태조사보고서가 있습니다. 이때 복학생 H가 조사반으로 현지에 다녀왔습니다.(001249)

 

유시민은 알릴레오에서 합수부 조사 때 김대중을 언급하는 것을 강요받았지만 정치인과 묶여서 휘말리면 안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유시민은 진술서에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술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줄 알면서도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사회학과)이었습니다라며 민청협에 인용부호까지 표시했으며, 여타 학우들의 이름 옆에 학년, 학과까지 상세히 기술했다. 유시민은 자신의 행적은 소극적인 방관자로 기술하고 학우들, 특히 복학생들의 행적은 적극적이고 상세하게 기술하여 합수부에 가이드라인을 제공한 셈이었다.

 

517일 김대중 씨를 체포한 5일 후인 522일 합수부는 다음과 같이 중간수사발표를 한다.

 

계엄사는 5.22.(: 본 의원은 수배 중) 김대중이 학생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선동하여온 확증을 잡고 연행 조사 중인데, 김대중은 정상적 정당활동 등을 통해서는 정권 획득이 여의치 못할 것으로 판단, 변칙적 혁명 사태를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할 계기를 조성하기로 하고,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통하여 5월 중순 대학 교내·외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예춘호, 문익환, 조성우, 장기표 등과 회동, 5.22. 정오를 기해 민주화촉진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제 봉기를 획책하는 등 대중선동과 민중봉기로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내용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였음.

계엄사는 위 발표에서 김대중의 대학별 배후조종 지원 선동사례1980.3.초 서울대생 심재철에게 100만원을 제공하고, 심재철이 학생회장에 당선, 시위를 주동한 사실, 복학생 박계동의 소개로 만난 고대생 박○○에게 45만원을 제공하고, ○○이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을 조종, 시위를 벌인 사실과 그 밖에 1980.5.경 부산대 복학생 도○○에게 34만원을 제공한 사실을 드는 한편, 사상 배경으로 김대중이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을 결성, 일본본부의장으로 취임한 사실을 적시하여 용공행위를 해왔다고 밝혔음.”(1995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재조사한 서울중앙지검 보고서 150~151)

 

본 의원은 김대중 씨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사실도 금품을 수수한 적도 없었다. 김대중 씨를 만난 것은 80411김상진 열사 추모식 때 김대중 씨가 학교에 찾아와 본 것이 전부였고 김대중 씨의 아들 김홍일 씨를 만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김홍일 씨는 합동수사본부 사법경찰관 작성의 진술조서에 “19805월 초순 일자미상 12:00경 동교동 김대중가에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접속하고 동인에게 50만원(1만원권 50)를 지급하고, 자기 선배인 숭전대학교 총학생회장 윤여연도 민주화 투쟁으로 고생이 많은 모양인데 이 돈을 전달해달라”(사법경찰관 작성의 참고인 진술조서 00736)고 거짓 진술했다. 김홍일 씨는 또제가 심재철 및 박계동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 김대중이 금년 2.29 복권 이후 동인 등이 동교동을 방문, 김대중과 접견 시 알게 되었습니다.”(000738) 라며 만나거나 가본 적도 없는 본 의원이 동교동을 방문해 돈을 받았다고 허위 자백했다. 김홍일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후 검찰관 작성의 참고인 진술조서에서도 똑같은 진술을 했지만 김대중씨 공소사실 입증 증거로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검찰관 작성의 참고인진술서(김홍일)에는 본 의원에 관한 진술만 줄이 그어진 채 삭제되었다.

 

유시민의 진술은 김대중과 학생시위 지도부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던 신군부가 퍼즐을 맞출 수 있는 단서, 곧 민청협과 복학생의 시위 개입 내용을 제공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그림을 그리는데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사 초기 연청(회장 김홍일)과 심재철(수배중)을 비롯한 학생지도부와의 연관성을 조작하기 위해 김홍일 씨의 거짓 자백까지 확보했지만 워낙 연관성이 없는 터무니없는 정황이라 부심하던 신군부는 연청 대신 국민연합과 관련있는 민청협(위원장대리 이해찬)을 학생시위의 배후세력으로 설정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완성해나갔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알릴레오에서 김대중 총재하고 엮는게 목표예요. 그러니까 인제 자기들끼리 진술서를 받다가 뭐가 나오면 비교를 해요. 서로 정보 공유를 하고. 그러고 야 이 건은 얘가 이런 진술을 했는데 쟤를 좀 족쳐봐. 그러면 인제 딴 사람 관련된 딴 사람을 족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이 유리한 진술을 누군가가 하면 그 진술에 맞춘 진술을 하도록 두들겨 패는거죠,“ 유 이사장은 여러 명의 진술을 취합해서 합수부가 새로운 증거를 만들어갔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유시민의 진술서에 등장한 복학생들의 가두시위 촉구의 구체적인 행적과 이름, ‘김대중과 관계있다는 민청협 회장 이해찬등이 바로 신군부가 원하는 증거였다. 유시민의 진술 이후 신군부는 국민연합 등 김대중씨 사조직과 민청협에 대한 수사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신군부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면서 내세운 내란음모의 핵심 근거는 4·19처럼 시위를 통한 정권교체를 모의했다는 국민연합의 5.12. 북악파크호텔 모임이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중 이 모임의 대화내용을 가장 먼저 시인하고 자백한 사람은 H씨였다.

 

“CS과 함께 각 대학 학생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복학생들을 조종하여 정치문제를 이슈로 삼아 학생데모를 교외로 확대 계속되도록 하겠으니 이로 인한 과도체제의 구성문제는 민주제도연구소장 L 박사를 그 책임자로 정하자고 제의하자 이때 김대중 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C의 말을 듣고 있다가 좋은 생각이라고 하였으며, M, Y, L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좋습니다.”(1980.5.27. H씨 합수부 3회 진술서, 00982~00983)

 

하지만 이 진술서에는 복학생이라고 통칭되어 있을 뿐 구체적으로 이름이 거명되지 않아 합수부는 그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부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유시민의 611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사회학과)”이라는 진술이 나오고 이후 신군부는 복학생이 중심인 민청협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 복학생들의 행적이 616일 국민연합 M씨 진술(000518~000534)에서 추가로 확인되었고, 618일 민청협 간부 L씨가 민청협 전모를 자백했고(L씨 합수부 1회 진술, 000044), 619일 국민연합 지도부 M씨가 같은 공동체로 볼 수 있다며 국민연합과 민청협의 관계를 진술했다(M씨 합수부 진술서 3, 000656~000664, 000697~000707, 000755~768). 621, 22일에는 국민연합의 위원이자 민청협 회장인 C씨가 각 대학 복학생 대표들로 구성된 모임을 주재하면서 국민연합의 방향에 맞추어 나가도록 결정했다는 진술과 함께 5.12. 북악파크호텔 모임에서 언급된 5.8. 애천경양식집의 민청협 확대간부 회의 내용인 ‘4·19 같은 학생시위를 결의했다는 진술이 추가되어 신군부가 그리던 그림이 잡혀간다(C씨 합수부 1·2회 진술서, 000794~000802). 624일 검거된 민청협 위원장대리 이해찬은 626일 합수부 1회 진술에서 5.8. 애천 모임의 민청협 확대간부회의에서 결의된 4·19 시위와 같은 폭력시위 불사를 진술하고(000421~000422), 6272회 진술서에서 80.1.26 S, S과 김대중 씨를 방문했고(000474), 선배이자 민청협 간부인 L로부터 교내 이슈를 정치 이슈로 전환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교외 학원시위를 유도하라는 지시를 받았음을 진술하고(000483~000487), 6293회 진술서에서 5.8. 애천에서 열린 민청협 확대 간부회의는 ‘4·19처럼 정부공공기관을 장악함으로써 정부가 전복되면 그 수습을 위해 구성될 임시내각으로 국민연합이 그 모체를 이루고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의도로 진행된 것임을 진술했고(000529~000531), 714회 진술에서 4.29. 김대중 씨의 아들 김홍일을 만난 일과(001380~001383) 선배 L로부터 수차례 지시를 받아 민청협 복학생들을 통해 재학생 학생회에 가두시위를 교사했음을 진술한다.(001431~001434)

 

이해찬은 법정에서도 사주를 받아 학생 시위를 교사했다는 혐의를 십 여회 시인했다.

 

이해찬: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에게 서울대의 데모를 배후 조종하였습니다.(1 5차 공판조서, 001417)

 

검찰: 이신범을 만나 동인으로부터 학생회와 대학 신문을 복학생들이 장악하라 지시를 받은 사실이 있지요.

이해찬: .(15차 공판조서 001421)

 

검찰: 총학생회를 개최하여 12,000여명의 학생들로 하여금 15개의 플랭카드와 100 여개의 피켓을 앞세우고 비상계엄령의 해제등 구호를 외치면서 교문앞, 기숙사앞, 교련장, 4.19탑을 돌아 위 광장으로 진행하게 하는 등 불법시위 를 교사한 사실이 있지요.

이해찬: .(15차 공판조서 001443-1444)“

 

 

이같은 이해찬의 법정증언은 ‘L, C, 이해찬, 공소사실 시인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L, C, 이해찬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대부분 시인하면서 날짜와 장소 등을 수정해 주기도 했다’(조선, 한국, 동아, 경향, 1980.8.22.), ‘S, S씨의 학생 교외 시위주도, 각목·돌 준비시켜’(한국, 1980.8.23.) 등으로 보도되었고, 이후 재판도 이해찬 허위진술 시인’(한국일보, 1980.9.3.), ‘이해찬 부인 진술 뒤집고 사과’(경향, 1980.9.3.) 등의 제목으로 공소사실을 시인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모두 7회 보도되었다.

 

198074일 합수부의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최종 발표 4일 전인 630일 본 의원이 체포될 때 이미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여타 피고인 전원의 자백으로 완성되어 있었고 본 의원은 이미 완성된 공소사실에 꿰맞춰져 고문을 받았다. 그렇지만 본 의원의 이름은 김대중 씨를 비롯한 타 피고인의 재판 증거목록(101, 002227~2327)에 없다. 본 의원은 타 피고인 23명의 공소사실의 증인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본 의원의 진술은 타 피고인 공소사실의 증거가 아니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중 2명은 검찰이 증인청구한 법무사작성의 증인신문조서를 통해 김대중 씨의 유죄의 증거로 판시되는 등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서 김대중 씨의 10여 명의 측근들이 김대중 씨에 대한 합수부 증거로 목록에 올랐다. 하지만 본 의원의 이름은 김대중 씨나 그 측근들의 공소장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본인을 제외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전원이 공판 중 김대중 씨나 김대중 씨 측근에게서 돈을 받았다고 시인하는 법정 진술을 했지만 금품 수수 사실이 없는 것은 본 의원뿐이다.

 

본 의원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당시 피체(被逮) 상황이 신군부에 상세 좌표를 찍어줄 만큼 절박했었는지 궁금하다. 80년 동료들에게는 겨누어진 칼이 된 진술서에 대해 유 이사장은 수사국장도 감동시킨 문장력을 발견한 계기였다고 공영방송 전파를 통해 자랑했다. 야 글 진짜 잘 쓰지 않냐 그러면서 막 읽어주는거예요 그거를. 이야 눈에 보이잖아라고 했다.” 유시민은 1997년 자신의 저서에서 수사국장의 호의로 사무실 청소하는 혜택을 받았다고도 적었다. 수사관 사무실 청소할 정도의 배려를 받은 것이라면 결코 고문 같은 절박한 상황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805월에 계엄사 합수부에 잡혀갔을 때도, 나는 그 티케이의 의리라는 것 덕분에 약간의 '혜택'을 받았다. "경상도 놈이 그런다"고 처음에는 덤으로 주먹질을 하기도 했지만, 부산 출신 국장은 내 진술의 허점을 설렁설렁 넘겨주었고 나중에는 사무실 청소를 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호의'(?)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대선 게임의 법칙107, 돌베개 출판사, 1997)”

 

80년 서울역 광장에 섰던 우리 세대 대부분은 크건 작건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을 느낀다. 미완으로 끝난 80년 민주화운동은 훈장이 아니라 아픔으로 가슴에 새겨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본인이 975·18광주민주화유공자라면서 발급된 무상의료보험증을 반납하고 보훈처에 유공자 등록을 마다한 이유이기도 하다.

 

1999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재심결정이 내려진 후 본인은 20년을 기다렸다. 목숨을 다해 지키지 못한 시대적 책무와 미완으로 끝난 서울의 봄에 대해 스스로 정한 선고유예의 기간이었다. 2019419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마지막 피고인으로 청구한 재심청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본 의원의 역사적 책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학 신입생 유시민의 손을 이끌고 학생운동 동아리로, 구로동 야학교사로, 농촌봉사 활동 현장으로, 그리고 학생운동 지도부까지 대학시절 내내 함께 했던 선배이자 동지였던 본 의원은 유시민 이사장이 80년 미완으로 남은 서울의 봄 민주화운동의 시대적 책임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역사 앞에 좀더 겸허해지기를 바란다.

 

끝으로, 유 이사장은 자신의 진술서와 본 의원의 진술서를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동의한다. 아울러 공판 속기록도 함께 공개되어야 한다. 유 이사장이 먼저 자신과 가까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유족이나 피고인들을 설득해 공판 속기록 공개 동의를 얻어주길 바란다.

 

2019. 5. 2.

국회의원 심 재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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