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철 바른 힘, 선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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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전문] 심재철 1980년 6월30일 합수부 진술서
2019.05.07
의원실 | 조회 1193
[머니투데이 유동주 기자] [[the L] 1980년 당시 계엄사령부 합수부에 제출한 자필 진술서]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6일 언론에 배포하고 본인 블로그에 공개한 1980년 6월 30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제출했던 자필 진술서 원문 텍스트를 가감없이 그대로 아래에 전한다. 전문 파일(PDF)은 심 의원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 의원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맡고 있었고 만 22세였다.

[전문]

진술서(1회)

직업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

심재철

위 본인은 합동수사단 수배자로서 6월 30일 본인의 형 심OO, 심OO의 자수 권유로 방황하는 마음을 씻고저 자수하여 아래 사항을 진술하오니 선처 있으시기 바랍니다. 

본인은 父 심OO과 母 최OO의 7남매중 일곱 번째로 광주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형님, 누나의 보호 아래 성장하여 광주 수창국민학교와 광주 무진중학교와 광주 제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6년에 서울대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1년의 재수기간을 거친 뒤에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현재 영어학과 4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재학 기간중 매형인 장OO, 오OO의 도움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4학년에 진급하여 1980.3.28. 본교의 학생회장 선거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본인과 함께 입후보하였던 김기달과 양지청이 있었으나 위 2인 모두 다 이전의 학도호국단에 간부로서 활동하였었던 바 많은 학생들의 학도호국단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어렵지 않게 회장에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의 총학생회장은 각 과회장으로 이루어지는 총대의원 회의에서 선출하는 이른바 간접선거 방식으로서 선거시에 생길 수 있는 선거잡음의 방지에 최대의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교의 선거는 금품수수나 향응 제공 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으며 이것은 본인이 동 선거에 15만원 정도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생활하는데 경제적인 곤란을 별로 느끼지 않는 본인이지만 사범대라는 특수성을 현직 교단에 서기 전에 미리 경험해보고 또한 내 손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현해 보고자 겨울방학 동안에 초등학교 학생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와 태양출판사에서 펴낸 영어참고서의 주해서를 만드는 아르바이트 2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1979년 12월부터 1980년 2월까지 20만원 가량을 저축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80학년도 1학기 등록금 9만원을 집에서 타고 더욱이 장학금 2만원 짜리를 받음으로써 금학기 개강을 전후하여 17~18만원 정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 돈으로 선거 포스터와 사진 촬영, 본인의 소견문 인쇄 등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더욱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공식적인 선거비용 3만원씩을 지급함에 따라 본인의 선거에 따른 비용은 부족함이 없었고 깨끗하게 선거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본인의 양심에 따른 진술은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던 “김대중으로부터 심재권의 안내에 따라 선거자금 100만원을 받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진술합니다. 본인은 동교의 복학생으로 알려진 심재권과 어떠한 인척 관계도 없으며 심재권이라는 인물과는 대면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진술합니다.

이렇듯이 본인은 심재권이라는 인물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더더욱 김대중의 집에 방문하였던 적도, 혹은 김대중이나 그의 동조자부터의 어떠한 면담 요청도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거운동 유세 중에 말한 “학생운동은 정치와 관련을 가져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순수하기 때문에 힘을 발휘하는 우리의 호소력은 상실되고 만다”라는 요지의 발언과, 4월 11일 수원 농대에서 김상진 형 장례식 때 조문하러온 김대중과 함석헌 옹이 말하기에 앞서 본인이 말한 “지금 김대중 씨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코 우리들이 어느 특정인을 지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여러 가지 의견들 중의 하나로써 우리들은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요지의 발언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4.11. 수원 농대에서 열린 故김상진 열사 장례식에 김대중 씨가 참석했을 때 준 조의금 20만원 수표는 총학생회 통장을 거쳐 故김상진 열사 모교인 농대학생회를 통해 추모비 건립과 유족에게 전달된 것이 입증되어서 기소되지 않았다. 

김대중 씨와 본인 역시 공판 중 일치되는 진술을 했다. 그 외 본 의원을 제외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전부는 김대중 씨나 측근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법정 진술을 했다. 김대중 씨 공소장에 본인의 이름은 없으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증거목록 103쪽에서 타 피고인의 공소사실 입증 증거나 증인으로 본인의 이름이 기재된 것은 없다. 

또한 TIME지 기자인 C.J.Chang과의 회견시 ‘세 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NEWSWEEK지에서 평해논 것이 적절한 것 같다“ ”기성 정치이니들이 불신을 받고 있는 지금 학생이 정치인에게 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라는 요지의 답변을 한바 있습니다.

이상 진술한 바와 같이 기성 정치인 특히 김대중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을 진술합니다.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의 학생회의 첫 사업은 4.19 20주년 기념 행사였습니다. 기념행사 중 4월 11일의 농대에서 있은 장례식과 관학 캠퍼스에서 있은 추모식, 특히 관학캠퍼스에서 있었던 추모식 전에 추모식 준비에 있어서의 미비점은 복학생 임성규(사대)가 상장과 만장을 준비해 주는 협조를 얻었습니다. 

분향소의 설치는 본교 불교 학생회가, 진오귀 굿은 민속 가면극 연극회에서 각각 맡아서 처리하였습니다. 4월 11일의 추모식 이전에도 연극반의 마당극 공연이 있었는데 그때 학생회는 연극반과 마찰을 일으켜 언쟁을 하였습니다.

동일방직 마당극을 둘러싸고 여공을 교내에 들어오게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로 경영대 연극반 회장 이재익과 가정대 연극반원과 언쟁을 하였는데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경영대와 가정대의 연극 이후에도 진동아 굿을 할 때에도 마찰이 있었고 이 관계는 계속 되었습니다. 

4.19 20주념 기념행사가 끝난 후 병영집체 훈련 문제가 주요 문제가 되었다. 5월 4일의 입소 예정일을 앞두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입소 거부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대세에 밀려 계속 날을 보내다가 4월 말에 성대의 입소 거부자에 대해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입소거부, 영장발부, 시위, 휴교 등의 악순환이 거듭될 것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던 중에 인문대에 다니는 연석만이 병영 훈련 입소 거부는 옳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입소 거부의 입장을 철회해야 할 것이라는 뜻을 비쳐왔다.

연석만의 말에 내심 고민하고 있던 중에 힘을 얻어 종전까지의 입소거부라는 입장을 번복시키기로 결심하고 5월 1일 저녁에 각 단과대학 회장들을 소집하여 설득하였다. 이때 복학생들이 몇 명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사회대 박관석 비운동권 고교 선배, 인문대 이우재 등이 입소 거부 철회에 관한 설득을 도와주었다. 마침내 병영훈련에 응소하기로 결정하고 여태까지 입소거부의 입장을 표명했던 학생회의 돌발적인 번복 결정에 대한 학생들의 비난과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5월 2일날 학생총회를 열어 토론을 하고 그 날 저녁에 농성을 하면서 미진한 1학년들의 불만을 달래기로 하였다. 

2일날 학생총회를 열고 평화적인 교내 시위를 하며 교문앞에 12,000명이라는 생각도 못한 많은 수가 교문 앞에 연좌하였다. 다행히도 교문앞에서는 충돌이 없이 캠퍼스의 순환도로를 따라 4.19 탑을 거쳐 본교의 본관과 도서관 사이에 위치해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순환도로를 따라 돌지 않고 계속 교문 앞에 남아있던 일부 학생들이 교문에서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와 아크로폴리스에 남아있을 것인가 교문 앞으로 갈 것인가를 생각한 끝에 교문으로 가되 교문을 넘어서지 않는데 힘을 다하기로 하고 경영대 회장 정철상과 인문대회장 노창준 등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으나 잘 안되어 궁여지책으로 본인이 “계엄 해제를 14일까지 하고 만일 그렇게 안될 때는 15일날 학생총회를 열자”고 제의하고 “만일 휴교가 되어 등교할 수 없다면 15일날 오후 3시에 영등포에서 모이자”고 즉석 제의를 하였던 바 어느 정도 분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5월 2일의 고비를 넘긴 다음 본인의 신체 검사 때문에 본인은 5월 7일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에서 신체 검사를 받은 후 10일 밤에 본교의 당시 학생처장이었던 이수성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학교가 엉망이라고 급히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10일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이때 고대에서 서울시내 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본교 대의원 의장인 유시민과 학생활동 위원장인 이홍동이 참석하였다.

다음날인 일요일 날 오후에 다시 본교에서 회의를 열어 15일날의 대책을 논의한 결과 15일날 교문 밖으로 진출하지않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연대에서 온 대표는 연대 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으나 전체적인 결정에 따르도록 하였다.

15일날 교문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전국 학생회장의 모임을 16일날 이대에서 열기로 하였다. 당시 본인은 교문 밖으로 진출할 경우 반드시 휴교가 되리라고 예상했었기 때문에 15일날 나가지 않기로 한 이상 16일날 회의를 무난히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3일날 연대에서 교문밖으로 진출하자 본교의 분위기는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13일 오후에 연대에서 밤에 세종문화회관 뒷길에서 모이자며 본교에서도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11일의 서울시내 회장단의 결정사항을 무시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한 이상 협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타 대학에도 협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13일에 이어 14일날 다시 학생총회를 열었으나 이미 분위기는 기울어져 있었다. 14일날 교문밖으로 진출하여 영등포 시장 앞에서 30 여분 이상을 연좌하였다. 연좌가 끝난 후 당초 계획대로 당산동을 거쳐 다시 대방과 노량진을 거쳐 귀교할려고 하였으나 광화문으로 나가자는 여론이 빗발치며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당산동에서 대방쪽으로 돌아가려고 50여 미터쯤 갔을 때 중간에서부터 행렬의 방향이 다시 제 2한강교쪽으로 돌려져서 제2 한강교를 거쳐 아현동까지 이르렀다. 

아현동에서 대치하여 흩어진 후 본교 교수님들께서 타신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오다가 신림동에서 내려 체육과에 다니는 왕기준의 집으로 갔다. 청량리에 있는 왕기준의 집에서 14일 밤을 동 체육과 ◯신우와 함게 지낸후 15일 12시 경에 학교에 나갔다. 14일날 가두시위를 했기 때문에 휴교령이 14일 밤으로 내릴 줄 알았으나 그러하지 아니하여 얼떨떨한 상태로 학교에 가니 학생총회가 열려져 있었다. 

오전 중의 상황과 학생총회가 열리게 된 경위를 듣고도 가두 진출을 해야할 것인지 안해야 할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학생총회는 진출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었으며 본인에게 결정을 내려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14일날 영등포에 나가서도 시민들에게 냉랭한 시선만을 받았기 때문에 15일 당일도 차라리 나가서 시민들에게 호응도 받지 못하고 돌아오리라 싶어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서울역 앞에 도착해보니 사태는 상상외였다. 본교 학생들이 도착하여 이홍동에게 통제를 맡기고 남대문쪽으로 나가 보았더니 이미 동방빌딩 부근에서 대치하고 있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애당초 서울역 옆에 있는 그릴에서 몇 개 대학 회장들이 모여 여의도 광장으로 빠져나가기로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계속 대치 상태가 계속 되면서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협의하기 위해 본교의 마이크로 버스 안에서 9개 대학 정도의 회장단들이 모여 협의를 하였다. 협의 결과 인명 피해가 늘어날 것 같고 밤이 되면 통제가 완전 불가능해질 것으로 판단하여 자진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이대 총학생회장 안숙과 연대 부회장과 본인 그리고 이수성 교수와 함께 남대문서 정보과에 올라가 김종환 내무부 장관께 이수성 교수께서 전화로 연락한 후 해산을 시작하였다.

해산 후 고대에서 다시 회장단들이 모여 16일날 이대에서 모이는 시간을 오후 5시로 변경하고 16일날은 시위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16일 아침에 다시 본교로 돌아와 학생총회를 주재한 후 당일날 계명대에서 올라와 방문한 계명대 학생과 본 학생회의 체육부장 박명기 및 체육과 유수용과 함께 이대로 갔다. 5시 45분쯤 도착하니 이미 회의는 시작되었던 바 이홍동은 회의 준비차 이미 도착하여 있었다. 16일 저녁에 장소를 옮겨 회의를 계속하였다. 

19일부터 곧장 가두 시위로 들어가자는 의견과 일정 기간동안 관망을 한 연후에 다음 행동으로 옮기자는 의견, 그리고 계속 교내시위로 국한하자는 3 가지의 의견이 나왔다. 

3가지 방법을 놓고 토론을 한 끝에 두 번째의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두 번째의 방법에서도 일정기간을 언제로 할 것인가, 며칠까지를 관망할 것인가에 관하여 의견이 백출했다. 19일을 시한으로 잡자는 의견에서부터 30일까지를 시한으로 잡자는 의견, 그리고 이대에서 내놓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자는 의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시한 문제를 놓고 17일 새벽부터 장시간 토론을 했으나 합의점을 못 찾고 점심 시간이 되었다. 시한에 관하여 의견이 모아지지 않자 본인은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았다. 과연 시한을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시한을 설정하는 것과 설정 하지 않는 차이는 무엇인가? 이 점에 관하여 숙대 회장 형난옥과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5월 2일날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로 미봉책으로 제시하였던 “14일까지 계엄해제 요구”가 2일날 이후 학생회의 활동을 얼마만큼 제약을 했는가를 뼈저리게 반성했다. 

시한을 설정함으로써 그 다음 행동에 대한 프로그램을 학생들에게 알려야 하고, 우리들 스스로가 강경한 입장만을 강경한 입장쪽으로 스스로 몰고 들어가는 파국을 초래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시한을 제기한 한대, 고대, 연대, 계명대 등의 대표들에게 의사를 타진해 보았으나 설득을 시킬 수가 없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장시간 동안 회의를 계속한 결과 피곤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또한 지방에서 올라온 대표들은 “시한 조차 설정하지 않았을 때 과연 우리가 뭐하러 이 회의에 참석했는가 의심치 않을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도 또한 좌중에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 분위기가 산만해짐에 따라 어떤 결론이든지 빨리 내리고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들이 많았다. 

결국 본인이 다시 원점에서 생각한, 시한 설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전체적인 분위기에 밀려 버렸다. 마지막 이의가 기각되자 시한 설정에 있어서, 20일은 국민 연합이 잡은 날짜이므로 우리가 20일로 잡을 경우 학생들이 정치인들과 야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각 학교별로도 19일 하루 밤에 시간 여유가 없다는 의견 때문에 기각되고; 일주일 후인 24일(토요일)과 25일(일요일), 그리고 23일(금요일)은 23일로 시한을 설정할 때 다음날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부적절하고; 30일은 너무 멀고 등의 이유 때문에 22일과 26일 2개로 압축되었다.

본인의 생각은 설정할 바엔 임시 국회의 개회에 맞추어 볼 때 23일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20일날 개회선언과 안건상정, 21일은 공휴일, 22일은 국정보고, 그리고 23일날 임시 국회를 통해서 비상계엄이 해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상계엄 해제와 신총리·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퇴 의사 표명 날짜를 결정하고 있지 못할 때 이해찬이 보내서 왔다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하였다. “19일날 비상계엄이 해제될 것이며, 신현확 총리의 사퇴와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겸직금지 등을 포함한 중대 조치가 19일날 대통령 특별담화로 나올 것이다”는 것이다.

1980. 6.30진술인 심재철

유동주 기자 lawmak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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